
본문 범위 창세기 11장 1절-9절
바벨탑 이야기는 대개 교만의 예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교만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했고 무엇이 그 일을 그치게 했는지를 아홉 절 안에서 따라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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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하나이던 때, 그들은 동방으로 옮겼습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구음은 소리, 곧 발음을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말이 그럭저럭 통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억양까지 같았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갈등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잘 통하던 자리입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옮겼다는 말이 먼저 나오고 머물렀다는 말이 뒤에 붙습니다. 평지를 만난 것은 우연처럼 적혀 있습니다. 산도 골짜기도 없는 넓은 땅이었습니다.
시날은 돌이 흔치 않고 흙이 깊은 땅입니다. 다음 절에서 곧바로 벽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 땅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거기 거하고, 라는 짧은 말 바로 뒤에 서로 말하되가 이어집니다. 자리를 잡자마자 무슨 말인가를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통하던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첫 마디가 자, 입니다. 서로를 부추기고 마음을 모으는 말투입니다. 돌이 없는 땅에서 돌을 대신할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로 합니다.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대신하며라는 말이 한 절 안에 두 번 나옵니다. 주어진 것이 없으면 만들어 쓰면 된다는 태도가 이 짧은 문장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솜씨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다시 자, 로 시작합니다. 이번에 정한 것은 높이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더 읽어 보면 높이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유가 두 개 붙어 있습니다. 이름을 남기는 일과 흩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남고 싶고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은 낯설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방법으로 고른 것이 하늘에 닿는 대였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무너지는 일이 아니라 흩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겠다던 그것을, 보기 위해 내려오셔야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비웃는 말은 한 줄도 없는데 대비는 분명합니다. 사람이 재어 온 높이와 실제 사이의 거리가 이 한 절에 조용히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원인을 정확히 짚으십니다. 하나였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힘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막을 수 없겠다는 말입니다. 벌을 예고하는 말투라기보다 앞을 내다보는 말투에 가깝습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기서도 자, 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서로에게 건네던 말투가 그대로 되돌아온 것처럼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헐겠다거나 무너뜨리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습니다.
탑을 헐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흩으심이 먼저고 그침이 나중입니다. 벽돌이 모자라서도, 힘이 다해서도 아닙니다. 같이 말할 수 없게 되자 쌓던 것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습니다.
면하자던 일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흩어짐을 면하자고 시작한 일이 흩어짐으로 끝납니다. 성과 대는 완성되지도 무너지지도 않은 채 문장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이름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던 사람들이 이름을 얻기는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이 혼잡입니다.
10장에는 이미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나뉘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11장은 그 나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뒤늦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바로 뒤에 셈의 족보가 이어지고, 온 지면으로 흩어진 이야기가 그 끝에서 한 사람의 이름으로 좁아집니다.
흩어짐을 면하자고 시작한 일이, 흩어짐으로 끝났습니다.
묵상 포인트
- 첫째, 그들이 쌓기 시작한 이유는 이름을 내는 일과 흩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붙잡고 있는 일의 이유를 한 줄로 적는다면 어떤 문장이 될지 생각해 봅니다.
- 둘째, 하늘에 닿게 하려던 대를, 보시려고 내려오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스스로 크게 여기던 것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어떤 크기일지 잠시 떠올려 봅니다.
- 셋째, 성 쌓기가 그친 것은 재료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서였습니다. 요즘 말이 통하지 않아 멈춰 선 자리가 있는지 돌아봅니다.
창세기 11장의 앞부분은 아홉 절뿐입니다. 벽돌을 굽고 역청을 이기던 손과, 서로에게 자, 하고 건네던 말과, 하늘에 닿게 하겠다던 높이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멈춘 자리에 남은 말은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입니다. 이야기는 흩어진 온 지면을 뒤로하고, 족보를 지나 다시 한 사람에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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