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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성경

창세기 1장,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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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범위  창세기 1장 1절-31절

성경의 첫 장은 화려한 선언이 아니라 텅 빈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땅은 혼돈했고 깊음 위에는 어둠이 있었습니다. 그 위를 하나님의 영이 지나셨고, 그다음에야 말씀이 울렸습니다. 오늘은 그 순서를 천천히 따라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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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 천지창조 | 태초에, 빛이 있으라

혼돈과 공허 위를 지나던 영

창조 이전 깊은 물 위에 어둠이 덮인 수채화 삽화

1장의 첫 장면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땅은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으며, 깊음 위에는 어둠이 덮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창조의 첫 이미지가 빛이라면, 성경이 먼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위를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둠을 피해 계신 것이 아니라, 어둠 위에 머무르며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그 자리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삶에도 이런 시기가 있습니다. 방향이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결과도 없는 때입니다. 창세기 1장은 그런 자리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자리로 그려 냅니다.

아직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말씀이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빛이 있었다

어둠을 가르며 첫 빛이 퍼져 나가는 수채화 삽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창조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나가자 없던 것이 생겨나고, 섞여 있던 것이 나뉘고, 이름이 붙습니다.

이어지는 엿새 동안의 흐름을 보면 일정한 리듬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대로 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평가하십니다. 만드신 뒤에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매번 그것을 바라보고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빛과 어둠, 물과 뭍, 낮과 밤이 나뉘면서 세상은 살 수 있는 곳이 되어 갑니다. 질서는 자유를 빼앗는 틀이 아니라,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창조의 순서는 말씀이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보다 들은 것이 앞섭니다.

좋았더라, 그리고 심히 좋았더라

열매 맺힌 나무와 강물이 있는 풍성한 땅의 수채화 삽화

본문에서 반복되는 표현 하나가 마음에 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입니다. 이 문장은 각 날의 끝에 놓여 있고, 여섯째 날이 지난 뒤에는 심히 좋았더라로 한 번 더 강조됩니다.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곧바로 다음 일로 넘어가는 것이 익숙한 우리에게 이 반복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시고, 지으신 것을 바라보며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성과가 충분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존재의 가치가 성취보다 앞선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자리

저녁빛 들판에 작게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 수채화 삽화

여섯째 날,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에게는 형상이라는 표현이 붙습니다. 그리고 땅을 다스리고 돌보라는 역할이 맡겨집니다.

다스림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앞선 다섯 날 동안 하나님이 보여 주신 방식, 곧 말씀으로 질서를 세우고 지으신 것을 좋다고 바라보시는 방식이 그대로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자리는 권한이자 동시에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좋게 지으신 세상을 계속 좋게 지켜 내라는 부름이기 때문입니다.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대하시는 방식을 닮으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묵상 포인트

  • 첫째, 오늘 내 삶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자리를 떠올려 봅니다. 그곳을 실패로 여기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를 지나고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합니다.
  • 둘째, 무엇을 이루었는지로 하루를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시선을 빌려 나와 주변을 다시 바라봅니다.
  • 셋째, 내게 맡겨진 자리에서 다스림이 아니라 돌봄으로 하루를 살아 낼 수 있도록, 오늘 한 가지 구체적인 일을 정해 실천합니다.

태초의 이야기는 먼 옛날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둠 위에 말씀이 울렸듯이, 오늘 우리의 정리되지 않은 자리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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